속고 속이는 관계
귀족 아가씨인 히데코(김민희)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 밑에서 보호라는 명목하의 억압과 착취를 당한다. 어느 날 후지와라 백작(하정우)이 히데코의 집에 찾아와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새로운 하녀를 추천해주는데 추천받은 하녀는 바로 유명한 도둑의 딸로, 장물아비의 손에서 자란 소매치기 고아 소녀 숙희(김태리)였다.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될 아가씨를 유혹하여 돈을 가로채려는 목적을 가진 사기꾼 후지와라 백작의 제안을 받고 백작을 돕기 위해 아가씨의 하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막상 만나게 된 아가씨가 이렇게 예쁘다는 말은 없었잖아?! 분명 사기를 위해 접근을 했는데 이 위태로운 아가씨는 눈을 뗄 수가 없는 면이 있다. 히데코 또한 매일 이모부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으나 순박해 보이는 숙희에게 조금씩 의지하고, 둘의 사이에서는 미묘한 감정들이 흐른다. 과연 이 사기극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히데코의 이모는 벚꽃나무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어린 히데코는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히데코 또한 이모를 이해했을 것이다. 같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있으니깐 말이다. 이모부란 자는 히데코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권력을 유지한다. 별채에서는 지식인이랍시고 온 인간들이 추잡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히데코를 희롱한다. 히데코에게는 벗어날 힘이 없다. 이모부인 코우즈키가 어릴 때부터 히데코를 억눌러왔기 때문이다. 지하실에 대한 공포, 채찍질, 이모의 죽음. 이 모든 것들이 쌓여 마치 실에 매였던 벼룩이 실을 풀어주어도 높게 뛰지 못하는 것처럼 히데코는 무력함을 느낀다. 하지만 후지와라 백작이 접근하며 히데코에게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사기꾼이면서 동시에 이모부와 같은 남성인 후지와라 백작을 히데코는 완전히 믿지 않는다. 그러다 만난 숙희는 자신과 동일하게 여성이며, 똑같이 어머니의 부재를 가지고 있다. 마치 자신을 아이처럼 어루만지는 숙희에게 히데코는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한다. 여태까지 일방적으로 억압당하는 역할에서 숙희는 자신을 해방시켜주는 존재다. 자신이 당한 일들에 대해 분노해주고 자신의 손을 잡고 도망치도록 도와준다. 또 다른 억압이 될 존재인 후지와라 백작과는 차원이 다르다. 가부장제 질서와 엄격한 규율 안에서 숨죽여 당하던 히데코는 이제 반격을 하기 시작한다. 숙희는 히데코의 진정한 구원자였다.
꽉 닫힌 해피엔딩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조마조마했던 건 엔딩이었다. 혹시라도 둘의 사랑이 엇갈릴까 봐, 도망을 치는 데 잘못될까 봐, 누가 죽을까 봐, 잡힐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다행인 건 아주 꽉 닫힌 해피 엔딩이라는 점이다. 두 사람의 사랑과 도피가 실패했다면 분명 오랫동안 마음에 찝찝함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둘은 자유를 향해 떠나며 억압하던 두 인물은 철저히 응징을 당한다. 소설 '핑거 스미스'가 이 영화의 원작인데 감독은 다행스럽게도 원작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영화를 마무리하였다. 그래서 몇 번이고 다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새드엔딩이었으면 아마 한 번 본 뒤로는 다시 볼 생각을 안 했을 텐데 안심하고 여러 번 보면서 볼 때마다 행복해질 수 있었다. 매번 볼 때마다 좋아지는 장면이 달라지긴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역시 숙희와 히데코가 별채를 부수고 집을 박차고 나가는 장면이다. 그 부분은 다시 볼 때마다 희열이 느껴진다. 히데코를 성희롱한 서적들을 찢고 망가트리고 물에 빠트리는 사람은 가장 낮은 계급의 여성인 숙희다. 그 부분에서 가장 희열이 느껴진다. 이 구원 서사가 너무나 달콤해서 몇 번이고 다시 영화를 보았다. 물론 이 둘이 그 집과 이모부, 백작에게서 도망쳤더라도 가부장제가 무너진 것도, 그런 권력구조가 바뀔 일도 없지만 그 둘만은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란 게 큰 위안이 되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이 대사 하나로 이 영화가 나타내는 연대와 구원이 설명된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히데코와 숙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구원자의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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